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태평양 전쟁 (문단 편집) == 서론 == ||{{{#!wiki style="margin: -6px -10px" [youtube(uFgJ14Mllm0, start=32)]}}}|| ||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일본 내 긴급 속보 방송[* 영상 초입부의 노래는 [[일본 제국 해군]] 군가 [[바다에 가면]]이다.] || >臨時ニュースを申し上げます。臨時ニュースを申し上げます。大本営陸海軍部、12月8日午前6時発表。帝国陸海軍は、本8日未明、西太平洋においてアメリカ、イギリス軍と戦闘状態に入れり。帝国陸海軍は、本8日未明、西太平洋においてアメリカ、イギリス軍と戦闘状態に入れり。 > >임시 뉴스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임시 뉴스를 보내 드리겠습니다. 대본영육해군부에서 오전 0600시 발표. 제국 육,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 있는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 섰다. 제국 육, 해군은 오늘 8일 새벽 서태평양에 있는 미국, 영국군과 전투 상태에 들어 섰다. >---- >1941년(쇼와 16년) 12월 8일 오전 7시, 라디오 임시 뉴스 태평양 전선 개전은 1941년 12월 7일 [[일본 제국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에 위치한 [[미 해군]] 태평양함대 기지를 [[진주만 공습|기습 공격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일대를 [[남방작전]]을 통해 석권하고 [[인도]], [[호주]]까지 위협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미드웨이 해전]]과 [[과달카날 전투]]의 패배를 기점으로 점차 하락세를 타며, [[필리핀 해 해전]]에서 그나마 복구한 전력이 전멸당하고 점령지 대부분을 상실하고 본토 앞까지 내몰리게 된다. 항복을 거부한 [[일본 제국]] 수뇌부는 이후 지속적으로 패전을 거듭하다가 [[미국]]의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만주 전략 공세 작전]] 직후인 [[1945년]]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한다. 태평양 전쟁은 육상전이 주로 일어난 [[유럽]] 전선과 달리 [[태평양]]에서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해전과 상륙전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태평양 전구에 투입된 미군의 각 군 장병들 (바다와 관계가 없어도) 에겐 수륙양용작전의 비중이 중요했고 전쟁에서의 활약으로 전후 [[미국 육군]][* 미합중국 육군항공대 (United States Army Air Force) 는 종전 이후인 1947년 9월 18일 [[미국 의회]]의 'National Security Act of 1947 법안'에 따라 미 육군으로부터 분리되어, [[미국 공군]]이 되었다.], [[미국 해군]], [[미국 해병대]]는 크게 성장했는데 특히 미 해군은 태평양 전선의 주역이고, 이 전쟁에서 얻은 교훈을 매우 많이 활용했다.[* 예를 들어 만조와 간조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상륙작전을 했다가 큰 피해를 보자, 인천상륙작전처럼 이후의 상륙작전부터는 항상 수심을 확인하고 다른병과들의 도움을 받게 교리를 만들었다.] 지역환경 특성상 미군의 경우 지상군으로 해병대가 많이 투입되었으나 해병대만으로 작전의 모든 수요를 채울 순 없어서 [* 미 해병대의 병력규모는 2차대전이 발발한 1939년에 20,000명 (미 육군은 18만명), 미국이 전쟁을 개전한 1941년에 55,000명 (육군은 진주만 공습 직전에 170만명) 으로 증가했는데 이 때만 해도 해병 사단은 2개뿐이었고 제3해병사단은 과달카날 전투가 벌어지던 42년 9월에 창설된다. 전쟁 특수로 팽창한 미 해병대는 45년 종전 무렵 475,000명으로 증가했으나 사단은 6개에 불과했다. 자체 항공대를 편제했고 태평양 도서지역 곳곳에 배치된 섬 수비대들, 전투부대를 보조하는 각종 지원 및 후방부대, 기타 독립부대에도 병력을 적잖게 배정해야 했기 때문으로 추정] 미 육군도 전쟁 초기부터 많은 부대를 파병했다.[* 미 육군은 전쟁 전부터 필리핀 주둔군을 증강하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고 지상군과 육군 항공대의 각종 부대를 도합한 감편된 사단급 규모의 선발대가 개전 직전 현지에 막 배치되었고 추가로 더 많은 부대가 보내질 예정이었다. 후속부대의 선견대는 개전 직전, 선단에 실려 진주만 공습 당시 태평양 공해상에서 날짜변경선을 막 지나던 중이었다. 일본군이 필리핀 침공을 진행하면서 제해권, 제공권을 빠르게 장악해 필리핀 행 항로를 차단하면서 후속 미군은 호주로 보내졌으며 42년 전반기 동안 호주 및 미국 - 호주 간 병참선 방어를 위해 육군 4개 사단을 배치했고 (아메리칼, 제32, 제37, 제41보병사단), 그 후 44년까지 매 년마다 사단들이 증파되어 종전 시점엔 21개 사단이 활동 중이었다.] 종전 시점에서 미군은 육군과 해병대를 합쳐 27개 사단이 파병 중이었다. 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배경으로 한 전선인 만큼 [[유럽]]의 전장에 비해 해전의 비중이 컸으며, [[일본 제국 해군]] 주도하에 시작된 [[거함거포주의]]의 몰락과 [[항공모함]]을 중심으로 하는 기동전과 나아가 상륙전, 대규모 합동작전이 벌어졌다. 한편 문명화된 지역에서 어느 정도 선을 지키며 대결했던 유럽의 [[서부전선#s-2]]과는 다르게[* 물론 [[독소전쟁|동부전선]]은 문명인끼리의 전쟁이라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말할 수 없다. [[독일군]]과 [[소련군]]이 서로 주고받은 전쟁범죄만 봐도, 태평양 전선과 별다를 바 없다.], 야만인이라 칭해도 모자랄 정도의 [[일본의 전쟁범죄|일본군의 비이성적 만행]]([[식인]], 포로 학대, 민간인 살해, 인체실험 등)으로 인해 미군 및 호주군, 영국군은 박멸 식의 무자비한 전투를 벌였고, 2차대전 내에서도 상당히 처절했던 전장으로 손꼽힌다. 특히 [[아시아-태평양 지역]] 주민들이 큰 희생을 당했다. 일본군의 만행은 미국 수뇌부에게도 충격적이어서, [[미국 정부]] 차원에서 [[일본]]과 [[일본인]]들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느끼고 분석서를 의뢰할 정도였다. 그 결과 출판된 서적이 지금도 대표적인 일본학 도서로 꼽히는 [[국화와 칼]]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